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감하는 습관은 제품과 서비스를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필수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과거 제가 맡았던 제품과 서비스는 평소에 사용했던 경험이 있었거나, 어렵지 않게 시도할 수 있어서 사용자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휴먼스케이프에 와서, 희귀질환 분야의 제품을 맡게 되며 '정말 내가 사용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을 위한 좋은 제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라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인간 중심 디자인 (Human Centered Design)'을 떠올렸습니다.
인간 중심 디자인은 문제 해결 과정에 인간의 관점을 포함시켜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하는 문제 해결 방법론 중 하나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인듯 하나, 사실 생각보다 서비스를 사용하는 한 명의 '사람'을 향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 중심 디자인의 대척점에 있는 '공급자 중심 디자인'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간단한 기능인데도 도대체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는 제품, 사용자의 상황에 맞지 않거나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는 서비스가 있다면 바로 공급자 중심적으로 디자인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헬스케어 분야는 공급자 중심으로 만들어진 제품, 서비스, 제도가 만연합니다. 이에 휴먼스케이프는 인간 중심의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서비스 개발 초기부터 노력해왔습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직접 많은 사용자를 만나보는 것이겠지만, 희귀질환 환자는 그 수도 적고 그나마 연락된 사용자가 지방에 계시는 등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사용자 접점에서 일을 하는 사람 외에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적절한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의학 다큐멘터리나 서적 등 좋은 콘텐츠를 참고하는 것이 회사 내 모든 구성원이 서비스 사용자인 환자와 보호자분들을 이해하고 공감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닥터 샌더스의 위대한 진단'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좋은 예시인데요, 환자분들에게 잘 공감할 수 있도록 몰입감 있게 제작된 수작입니다. 아래에 콘텐츠 소개와 함께 어떤 환자의 어려움과 니즈를 발견할 수 있었는지도 소개해보겠습니다.
닥터 샌더스의 위대한 진단 (원제: Diagnosis)
닥터 샌더스의 위대한 진단(이하. 위대한 진단)은 뉴욕 타임즈에 원인 불명의 질병 진단 사례를 칼럼으로 연재하고 있는 Lisa Sanders(이하. 샌더스) 예일대병원 내과교수와 함께 넷플릭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입니다. 특히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기존 의료진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던 지점들을 해결해낸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먼저 뉴욕타임즈를 통해, 환자의 정보에 대해 상세한 '단서'들을 칼럼과 동영상으로 전세계 독자들에게 알립니다. 환자가 언제부터 질환을 앓게 되었는지, 증상은 어떠한지, CT, MRI, EEG 등 각종 병원 검사 기록, 어떤 진단과 치료를 받았는지 등을 말이죠. 타임즈의 독자들은 이를 보고 그 증상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 진단에 대한 생각, 조언 등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의대생, 의사, 비슷한 경험을 가진 환자, 일반인 등 전세계의 수많은 의학 '탐정'들이 진단이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과 응원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환자와 가족들은 전세계에서 보내온 여러 조언을 참고하면서 더 상세한 정보가 필요한 경우에는 영상통화를 요청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환자와 가족들은 올바른 진단을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환자들은 샌더스와의 상담, 본인의 주치의 또는 적절한 의료진에게 정확한 진단을 받으며 올바른 치료 과정에 이르게 됩니다.
희귀질환 환자의 어려움
위대한 진단의 총 7개 사례 속에서 다음과 같은 희귀질환 환자들의 어려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실제 환자가 겪는 어려움과 니즈는 이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하므로 환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가벼운 시작점으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 막막함
저희 사회에서 의사는 매우 부족한 자원입니다.
그래서 같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환자들을 살펴보고 치료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겪는 질병 위주로 훈련을 받고 진단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진단 방식의 문제는 희귀질환이 나타내는 증상은 너무 희귀해서 대부분의 의사가 훈련을 받은 내용으로는 진단을 할 수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위대한 진단에서도 환자의 의사가 '저는 진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의사를 찾아보세요' 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환자 입장에선 의사도 모르겠다고 하니 자신의 문제(질병)를 해결할 방법이 막막해집니다. 분명 어딘가에는 자신의 병의 진단할 수 있는 의사가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환자의 정보력으로는 찾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평균 7년에 달하는 진단방랑을 겪습니다. 위대한 진단의 사례에서는 10년이 넘도록 진단을 받지 못한 경우도 나옵니다.
다행히 진단을 받았다고 해도 막막함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아직 치료제가 없는 희귀질환이 95%에 달하므로 기약없이 치료제가 개발되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 최대한 병이 진행되는 것을 막거나 증상이 발현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필요한데, 위대한 진단의 한 사례에서는 식이요법으로 증상을 방지하는 법을 알아내서 생활을 되찾는 경우가 나타납니다. 위대한 진단이 아니었다면, 그 환자는 여전히 막막한 상태로 지냈을 것입니다.
2. 외로움
한 때 낙천적이고, 활동적이고,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던 사람도 희귀질환을 앓게 되고 나서는 외로운 상황에 처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특히 가슴 아픈 점은 다른 이들이 '꾀병 아니냐, 정신적인 문제 아니냐' 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반인 뿐만 아니라 의사들 조차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 환자들은 결국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외로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한 사례에서는 너무 희귀해서 아직 치료 방법이 마땅히 없는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 가족이 위대한 진단을 통해 지구 반대편 덴마크에 있는 자신과 동일한 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 가족과 연결되어 실제로 만남까지 이어져 공감과 위로를 얻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가족을 만나고 온 환자 아이는 '나랑 똑같은 게 있는' 다른 환자 아이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고 얘기합니다. 비록 아직 병의 치료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감정적 치유를 이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병의 치유도 중요하지만, 외로움을 해소하는 것 또한 중요한 니즈입니다.
3. 경제적 어려움
어쩌면 당연하게도 환자와 가족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합니다. 첫번째 이유는 질병으로 인해 경제적 활동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병원 검사와 치료 등 의료 비용 때문입니다. 한 사례에서는 환자가 진단을 받지도 못했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한 병원 검사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여 의사로부터 고소를 당하게 되고, 파산 신청까지 고려하는 상황이 나옵니다.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한 환자는 자신의 가족에게 '나를 떠나라' 는 말까지 합니다. 자신으로 인해 가족까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겠죠.
다행히 우리 사회에는 희귀질병 환자에게 다양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정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단을 아직 받지 못한 환자의 경우, 지원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경제적 지원을 받기 어렵습니다. 마음 아프지만 환자들이 겪고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4. 환자의 심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커뮤니케이션
한 사례에서는 한 의사로부터 겪은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의료진을 신뢰하지 못할 경우, 적절한 진단과 처방임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환자가 의심이 많은 성향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의사가 '환자의 잘못'으로 이해되도록 커뮤니케이션했기 때문에 환자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킨 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례에서는 소수인종의 여성 환자가 백인 남성 의사로부터 무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것이 단순히 환자의 느낌이었는지 실제로 의사가 무시를 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종 혹은 성별에 따른 불신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환자가 의료진을 신뢰할 수 없으면 적절한 진단과 치료가 이뤄질 가능성이 매우 낮아지므로 환자와 의료진 간의 신뢰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더 깊은 사용자 이해를 위해
다큐멘터리나 서적 같이 특정인의 삶을 깊이 관찰하고 조명한 콘텐츠는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기에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외에 부자연의 선택, 한국인의 종합병원 등의 콘텐츠도 같은 맥락에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자주 접점을 마련하기 어려운 사용자일 수록 콘텐츠를 활용한 방법을 적극 활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 처음에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희미한 상태였는데, 이 과정을 통해 새로운 궁금증과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저와 휴먼스케이프는 실제 환자와 사용자를 만나며 더 깊은 이해를 더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이 과정에서 발견한 환자의 어려움과 문제를 저희는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 나눠보겠습니다.
작성 : Puter
디자인 : Mary
편집 : Z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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