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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질환은 환자 수가 적은데 시장의 크기도 작지 않나요?"
이는 제가 희귀질환 관련 스타트업에 종사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입니다.
스타트업이란 자고로 큰 시장에서 J 커브를 그리며 빠르게 성장해야 하는데, 시장 자체가 작으면 그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병인구가 적다는 이유로 그동안 제약, 바이오 시장에서 희귀질환 치료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었던 것이 맞습니다. 질환의 원인 규명이 어렵고 치료제 개발 비용 대비 매출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상황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희귀질환 치료제 시장은 2024년까지 연평균 11.2%씩 성장하여 약 $217B(약 240조 원)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이는 전체 제약 시장의 18%를 차지하는 수준이며, 기존 제약 시장의 성장 속도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입니다.
그리고 2019년 美 FDA의 CDER(Center for Drug Evaluation and Research)에서 승인한 신규 의약품 49개 중 44%(21개)가 희귀의약품이었습니다. 2000년대 전만 하더라도 새롭게 승인받는 희귀약품이 한 자리 수였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입니다.
글로벌 제약사도 이러한 흐름에 발 맞추어 희귀질환 치료제와 파이프라인 확보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최근 제약 시장에서는 대규모 M&A도 많이 발생했습니다.
다케다 제약의 샤이어 인수
일본의 '다케다약품공업'이 희귀약품 전문 개발사 '샤이어'를 약 $62B(약 66조 원) 규모로 인수한 사례가 있습니다. 참고로 이 사례는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BMS의 세엘진 인수
한편 미국의 대형 제약사 'BMS'는 희귀질환 치료제를 다수 보유한 '세엘진'(Celgene)을 $74B(약 81.4조 원) 규모에 인수하며 희귀질환 시장 공략에 나섰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는 시점에 '카카오'의 시가총액은 57조 원이었으며, 카카오 회사 전체를 통째로 인수하는 것보다 더 큰 규모의 투자를 집행했다고 생각하면 그 규모를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무시 못할 트렌드가 된 희귀질환 시장,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유전자 분석 기술의 발전 🧬
과거에는 희귀질환의 원인을 찾는 것이 불가능했거나 매우 많은 비용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유전자 분석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그 문턱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희귀질환의 80%는 특정 변이 유전자가 질환을 유발하는 유전성 질환입니다. 그래서 유전자 분석을 통해 질환의 매커니즘을 연구하고 병명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약 20년 전만 해도 이는 굉장히 비싸고 오래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유전자 전체를 처음 해독한 것은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 Human Genome Project) 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인간의 유전체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미국, 영국, 일본 등 6개 국가의 과학자들이 참여한 대규모 사업이었습니다.
1990년에 시작된 HGP는 약 13년의 연구 끝에 인간 유전체에 있는 약 30억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염기쌍 서열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HGP에 소요된 비용은 약 27억 달러(약 3조원) 가량이었습니다. 이 때만 하더라도 개개인을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유전자 시퀀싱 분야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2003년 대비 수백만 배 이상의 효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24시간 이내, 약 $1,000(약 110만 원)의 비용으로 한 명의 유전자를 온전히 해독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습니다.
18개월 마다 반도체의 성능이 2배씩 좋아진다는 '무어의 법칙'을 알고 계신가요? 유전체 분석 분야의 발전 속도는 이를 훌쩍 뛰어넘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기의 발전 속도와 비교하면 유전체 분석 기술이 얼마나 빠르게 진보했는지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유전체 분석 기술이 발전하면서 정확한 병명을 알기 어려웠던 환자의 진단이 가능해졌습니다. 또한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연구에 바탕이 되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되어 희귀질환 신약 연구/ 개발의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정책 당국의 희귀약품 치료제 개발 장려 🧑🔬
1900년대 중후반 즈음 간단한 수준의 약품은 대부분 개발되었고 신약 개발은 점점 고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안전성, 유효성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며 신약 개발 비용은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자연스럽게 제약사들은 '돈이 되는' 질환에만 투자하게 됩니다. 시장논리에 따라 유병인구가 적은 희귀질환은 소외받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1983년 미국은 희귀약품 법(ODA, Orphan Drug Act)을 제정하며 희귀약품 개발을 적극 장려하기 시작했습니다. 희귀약품법(ODA)는 희귀약품을 개발하는 제약사에게 인센티브를 주어 연구 개발에 투자할 동기를 자극했습니다.
인허가 신청 비용의 면제, 세금 공제 등의 혜택과 허가심사 기간을 단축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연구 접근성을 높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시판허가 된 희귀약품에 대해 7년간 시장 독점을 인정해준다는 점은 제약사에게 매력적이었습니다.
2018년 ~ 2025년 사이에는 많은 매출 비중을 차지하는 블록버스터 약품의 특허 만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제약사들은 새로운 시장 개척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블루오션이었던 희귀질환 치료제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희귀질환의 95%는 FDA승인을 받은 치료제가 없습니다. 이는 제약사로 하여금 새로운 시장 진출의 동기가 됩니다.
그리고 희귀질환 치료제의 약가를 높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됩니다. 희귀질환 약품은 수백만 원에서 수억 억 원까지 호가합니다. 누군가는 약가가 너무 비싸다고 비판하겠지만, 약품의 가격은 제약사가 아무 근거 없이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자가 평생 동안 감당해야 할 비용과 고통 대비 치료제가 줄 수 있는 편익을 계산해야 하고, 정부나 보험사 등과 논의하여 시장에 내놓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도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다는 점은 제약사가 치료제 연구 개발에 투자할 동기부여가 됩니다.
비싼 약품 가격은 향후 다른 제약사의 시장 진출을 자극할 수 있고 경쟁은 더 많은 기술의 발전과 가격 하락을 불러옵니다. 약품의 효과와 안전성을 향상함은 물론 투여 방식, 투여 횟수를 개선하는 것이지요. 경쟁의 결과는 결국 최종 소비자가 수혜를 보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기술의 발전과 정책 변화로 희귀의약품 개발의 비용 대비 기대 수익이 좋아졌습니다. 자연스럽게 기존에는 투자하기 꺼려했던 제약사들이 연구 개발에 뛰어들었고 희귀질환 시장이 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희귀질환의 시장이 크다는 인식이 널리 널리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바이오 벤처, IT 스타트업이 희귀질환 시장에 참여하여 기술 발전을 이룩하고, 아직 치료법이 없어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으면 합니다.
작성 : haritson
디자인 : mary
편집 : z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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